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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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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곡면 지명유래

오곡면의 마을별 지명유래
오지1구 전동(前洞)마을
오지1~8리 마을 중 오지리6구(창동) 마을만 분리되어 있을 뿐 7개마을이 거의 한곳에 모여 있어 예로부터 큰 마을이라 하여 ‘대리(大里)’라 불러왔다. 그러나 지방도 840호선이 마을의 중심부를 지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일명 ‘옷갓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마을의 형세가 ‘옷(衣)과 갓(冠)’의 산형지세(山形地 勢)를 닮은데서 연유되었다고 전한다. 한편으로는 ‘의관(衣冠)만 번듯하게 차린 양반(兩班)들이 많이 산다’는 비어(鄙語)에서 비롯됐다고도 전한다.
‘오지(梧枝)’는 곡성의 진산(鎭山)인 동악산(動樂山)의 형세가 풍수지리상 봉황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비봉포란혈(飛鳳抱卵穴)’이어서 죽동(竹洞), 죽곡(竹谷), 서봉(棲鳳), 유봉(留鳳) 등과함께 봉서오지(鳳棲梧枝) 즉, ‘봉황은 대나무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오동나무가 아 니면 앉지를 않고 맛좋은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를 않는다(鳳凰非竹實不食, 非梧桐不棲, 非醴 泉不飮)’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연유로 오곡 뿐만 아니라 곡성지역에는 오동나무 오 (梧)자와 봉황 봉(鳳)자, 대죽(竹)자가 들어 간 지명이 많은 것으로 유추된다. ‘전동(前洞)’은 대리(大里)의 마을 앞 동네라 해서 붙여진 마을명이다.
오지2구 남동(南洞)마을
마을이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남동(南洞)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지리 전 마을에는 조선조 중엽부터 마을의 도둑을 방지하기 위해 동서남북에 사대문(四大門)을 달아 아침저녁 으로 시간을 정해 열고 닫았다. 이로써 전란(戰亂)에도 방적(防賊), 방범(防犯)이 잘 되어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덜었다. 마을의 규모가 커서 동·남·전·후·내·상동(東·南·前·後·內·上洞)으로 분동(分洞)하고 각 동의 유사(有司)와 리(里) 총유사(總有司)를 두어 운영해 왔다. 현재는 당산(堂山), 신동(新洞), 창동(倉洞)을 추가하고 내동(內洞)을 폐지(廢止)하여 8개 행정 리로 구분하였다.
오지3구 동동(東洞)마을
오지1~8리 마을 중 오지리6구(창동) 마을만 분리되어 있을 뿐 7개마을이 거의 한곳에 모여 있어 예로부터 큰 마을이라 하여 ‘대리(大里)’라 불러왔다. 그러나 지방도 840호선이 마을의 중심부를 지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일명 ‘옷갓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마을의 형세가 ‘옷(衣)과 갓(冠)’의 산형지세(山形地 勢)를 닮은데서 연유되었다고 전한다. 한편으로는 ‘의관(衣冠)만 번듯하게 차린 양반(兩班)들이 많이 산다’는 비어(鄙語)에서 비롯됐다고도 전한다.
‘오지(梧枝)’는 곡성의 진산(鎭山)인 동악산(動樂山)의 형세가 풍수지리상 봉황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비봉포란혈(飛鳳抱卵穴)’이어서 죽동(竹洞), 죽곡(竹谷), 서봉(棲鳳), 유봉(留鳳) 등과함께 봉서오지(鳳棲梧枝) 즉, ‘봉황은 대나무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오동나무가 아 니면 앉지를 않고 맛좋은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를 않는다(鳳凰非竹實不食, 非梧桐不棲, 非醴 泉不飮)’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연유로 오곡 뿐만 아니라 곡성지역에는 오동나무 오 (梧)자와 봉황 봉(鳳)자, 대죽(竹)자가 들어 간 지명이 많은 것으로 유추된다. 마을이 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동(東洞)이라 칭하게 되었다.
오지4구 후동(後洞)마을
오지1~8리 마을 중 오지리6구(창동) 마을만 분리되어 있을 뿐 7개마을이 거의 한곳에 모여 있어 예로부터 큰 마을이라 하여 ‘대리(大里)’라 불러왔다. 그러나 지방도 840호선이 마을의 중심부를 지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일명 ‘옷갓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마을의 형세가 ‘옷(衣)과 갓(冠)’의 산형지세(山形地 勢)를 닮은데서 연유되었다고 전한다. 한편으로는 ‘의관(衣冠)만 번듯하게 차린 양반(兩班)들이 많이 산다’는 비어(鄙語)에서 비롯됐다고도 전한다.
‘오지(梧枝)’는 곡성의 진산(鎭山)인 동악산(動樂山)의 형세가 풍수지리상 봉황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비봉포란혈(飛鳳抱卵穴)’이어서 죽동(竹洞), 죽곡(竹谷), 서봉(棲鳳), 유봉(留鳳) 등과함께 봉서오지(鳳棲梧枝) 즉, ‘봉황은 대나무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오동나무가 아 니면 앉지를 않고 맛좋은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를 않는다(鳳凰非竹實不食, 非梧桐不棲, 非醴 泉不飮)’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연유로 오곡 뿐만 아니라 곡성지역에는 오동나무 오 (梧)자와 봉황 봉(鳳)자, 대죽(竹)자가 들어 간 지명이 많은 것으로 유추된다. 마을이 뒷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후동(後洞)이라 칭하게 되었다.
오지5구 상동(上洞)마을
오지1~8리 마을 중 오지리6구(창동) 마을만 분리되어 있을 뿐 7개마을이 거의 한곳에 모여 있어 예로부터 큰 마을이라 하여 ‘대리(大里)’라 불러왔다. 그러나 지방도 840호선이 마을의 중심부를 지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일명 ‘옷갓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마을의 형세가 ‘옷(衣)과 갓(冠)’의 산형지세(山形地 勢)를 닮은데서 연유되었다고 전한다. 한편으로는 ‘의관(衣冠)만 번듯하게 차린 양반(兩班)들이 많이 산다’는 비어(鄙語)에서 비롯됐다고도 전한다.
‘오지(梧枝)’는 곡성의 진산(鎭山)인 동악산(動樂山)의 형세가 풍수지리상 봉황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비봉포란혈(飛鳳抱卵穴)’이어서 죽동(竹洞), 죽곡(竹谷), 서봉(棲鳳), 유봉(留鳳) 등과함께 봉서오지(鳳棲梧枝) 즉, ‘봉황은 대나무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오동나무가 아 니면 앉지를 않고 맛좋은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를 않는다(鳳凰非竹實不食, 非梧桐不棲, 非醴 泉不飮)’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연유로 오곡 뿐만 아니라 곡성지역에는 오동나무 오 (梧)자와 봉황 봉(鳳)자, 대죽(竹)자가 들어 간 지명이 많은 것으로 유추된다. 마을이 위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상동(上洞)이라 칭하게 되었다.
오지6구 창동(倉洞)마을
본래 마을명은 ‘기와막등’ 또는 ‘기와막등 주막거리’라 불러오다가 1932년 전라선철도(全 羅線鐵道) 개통(開通)과 더불어 곡성역(谷城驛)이 생기면서 일본강점기 수탈(收奪)의 상징인 창고(倉庫)가 신축된 이후 주변 들녘을 ‘창고(倉庫)들’, 마을을 ‘창동(倉洞)’이라 불러왔다.
오지7구 당산(堂山)마을
고대에 대리(大里)가 형성될 당시 상고인(上古人)의 신앙인 소도(蘇塗), 성황당(城隍堂), 산신당 (山神堂) 등에 당제(堂祭)를 올린 성스러운 산이 있다고 하여 ‘당산(堂山) 마을’이라 불러왔다.
오지8구 신동(新洞)마을
새로 생긴 동네라 해서 ‘새뜸’이라 부르고 한자표기로 ‘신동(新洞)’이라 불렀다. 창동과 더불어 6구에 속해 있다가 1983년 행정구역(行政區域) 변경(變更)으로 분리 8구가 되었다.
덕산리 덕산(德山)마을
‘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매밑에’ 또는 ‘뫼미테(山底里)’, ‘금천변 양지쪽 마을’이라는 뜻의 ‘양지뜸(錦溪里)’덕양서원(德陽書院) 및 완계정사(浣溪精舍)가 있는 서당골이라 해서 ‘서우네 (書院里)’라고 각각 호칭되어 불러왔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당시 세 마을을 병합(倂合)해 천덕산(天德山) 아래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천덕산(天德山)에서 덕산(德山)을 취해 ‘덕산리(德山里)’라 명명했다.
침곡리 침곡(寢谷)마을
유씨종산(柳氏宗山)에 묘가 ‘침혈(寢穴)’의 명당이라 여겨 ‘침실(寢室)’이라 불러왔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침곡(寢谷)이라 정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송정리 송정(松亭)마을
섬진강(蟾津江)으로 흘러드는 도산천(桃散川) 시냇가에 소나무 정자가 있어서 경치가 빼어남 으로 ‘솔정자’의 ‘소정’ 또는 ‘쇠정’으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당시 송정리(松亭里)로 마을명을 정했다.
봉조1리 서봉(棲鳳)마을
‘말골’은 곤방산(困房山)에 있다는‘양마부적(良馬赴賊)’형국의 명당설을 쫓아 ‘말골’이라 했다는 설과‘골짜기 형세가 말(斗)같이 생겼다’하여‘말골’이라 했다는 두 설이 있다. ‘서봉 (棲鳳)’은 마을형국이 비봉포란(飛鳳抱卵) 혈이라 하여 ‘봉(鳳)이 깃들인다(棲)’는 뜻으로 ‘서봉 (棲鳳)’이라 불렀다. 1914 행정구역 개편 당시 옆마을인 현조(玄鳥)마을의 조(鳥)자와 서봉(棲鳳)의 봉(鳳)자을 합하여 ‘봉조리(鳳鳥里)’라 부르게 되었다.
봉조2리 현조(玄鳥)마을
330년전 순흥안씨(順興安氏) 선산(先山)에 묘 구덩이를 파던 중 ‘검은 새 한 마리가 날아 가고 한 마리는 남아 있었다’는 전설(傳說)에 따라서 ‘검새골’ 즉 ‘현조동(玄鳥洞)’이라 부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옆 마을인 서봉(棲鳳)의 봉(鳳)자와 현조(玄鳥)마을의 조(鳥) 자를 합하여 ‘봉조리(鳳鳥里)2구’라 부르게 되었다.
압록1리 압록(鴨綠)마을
섬진강(蟾津江)과 보성강(寶城江)의 푸른물이 합류하는 곳이라 하여 ‘합록(合綠)’이라 부르 다가 400여년전 마을이 형성되면서 은어(銀漁)들을 잡아먹기 위해 오리떼 등 철새들이 많이 날아드는 것을 보고 합(合)을 오리압(鴨)으로 바꾸어 압록(鴨綠)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한다. 또한 이 지역의 수려한 경치는 예로부터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곡성팔경 (谷城八景)의 하나인 압록귀범(鴨綠歸帆)으로 표현(表現)했다.
압록2리 이정(梨亭)마을
마을 형성 당시 마을 주변에 고목(枯木)이 된 배나무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배정이’ 곧 ‘이정리 (梨亭里)’라 부르다 병합(倂合)되면서 압록2구가 되었다. 일설(一說)에는 청루(靑樓)인 유곽 (柳廓)의 이름이 이화정(梨花亭)이었던 데서 연유(緣由)한다고도 하나 확실치는 않다.
승법리 승법(承法)마을
본 마을로 이주할 당시 법당(法堂)이 있었기 때문에 승법리(承法里)라 부르게 됐다 전한다.
명산리 명산(明山)마을
1846년경 당시 마을명은 우곡면(牛谷面) 초동리(草洞里)로 나타나 있다. 풍수지리설비결(風 水地理說秘訣)에 이르기를 ‘통명산하십리허(通明山下拾里許)에 와우혈(臥牛穴)’이 있는데 이 명당터만 잡는다면 ‘삼승구장금천금(三丞九將錦千錦)’한다 하여, 소의 여물인‘풀 초(草)’자를 써서 초동리(草洞里)라 명명하였다. 그러나 해주오씨(海州吳氏)가 와우혈(臥牛穴)인 이곳에 마을 터를 잡아 이주해 오면서 ‘초동(草洞)’이라는 마을명 대신 ‘소가 우는 산’이라 하여‘울 명 (鳴)’을 취해 ‘명산(鳴山)’이라 바꾸어 불렀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통합 당시 우곡면(牛谷面)이 오지면(梧枝面)과 통합, 오곡면(梧谷面)이 되면서 마을이름도 통명산(通明山) 아래쪽의 마을 이라 하여 한자 지명을 바꾸어 명산(明山)이라 개칭했다.
구성1리 쌍구(雙龜)마을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하면 마을터가 쌍구혈(雙龜穴)에 자리잡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당시 아래쪽 마을인 장성동(長城洞)과 병합, 구성리(龜城里)로 개칭되었다.
구성2리 장성동(長城洞)마을
마을 뒤로 우곡성(牛谷城)이라는 고성지(古城址)가 있어서 지형을 좇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장승이 서 있는 벅수거리였기 때문에 장승백이, 장승몰, 장선동, 장성동(長城 洞)으로 구전된 것이라고도 전해온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시 쌍구동(雙龜洞)과 장성동(長城 洞)이 병합(倂合)되어 구성리(龜城里)로 개칭되고 구성2리(龜城2里)가 되었다.
미산1리 산수동(山水洞)마을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따르면 마을 뒷산이 쥐(鼠)혈이어서 산서동(山鼠洞)이라하던 것을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곳이니 산수동(山水洞)으로 고쳐 불렀다 전한다. 속칭 ‘산석골’이라고도 부른다. 미륵골 골짜기에는 골짜기 초입의 번다몰, 산수동, 미륵동 등 3개의 마을이 한 마을로 운영되었으나 1947년부터 각각 행정구역을 분리, 미산리 1, 2, 3리로 구분해 오고 있다.
미산2리 번다몰마을
‘갈마지기(양정지들)’에 권씨(權氏)들이 부유하게 100호 이상 살며 번성했기 때문에 ‘권다(權多)몰’이라 불렸으나 마을은 폐촌(廢村)되고 자손들은 분산되고 말았다 한다. 그 후 약 250년 전 현 위치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권다몰’과 어음이 비슷하게 ‘번다몰’로 와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미산3리 미륵동(彌勒洞)마을
마을 주변에 절이 많아 ‘미륵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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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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