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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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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기면 지명유래

삼기면 지명유래 정보를 제공하며 의동마을(義洞) 내동마을(內洞) 인동마을(仁洞) 학동마을(鶴洞) 어덕촌마을(於德村) 월경마을(月境) 행정마을(杏亭) 연봉마을(蓮峯) 괴소마을(槐所) 서봉마을(棲鳳) 의암마을(儀岩) 금반마을(金盤) 율곡마을(栗谷) 청계마을(淸溪) 봉현 마을(鳳峴) 주산(舟山)마을 오리동마을(梧里洞) 대명마을(大明) 남계마을(南溪) 동편마을(東便) 수산동마을(水山洞) 근촌마을(根村) 수금마을(繡錦) 복룡마을(伏龍) 통명마을(通明) 등의 항목으로 구성된 표
의동마을(義洞) 원등1리
당초 초악산 아래 신흥촌(新興村)이라는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지대가 높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원등리(院嶝理)는 역원(驛院)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말을 매어 놓았다는 마밭뜰(馬田뜰)이 있어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순에 따라 원등리 3구가 먼저 첫 자인 인동(仁洞)으로 칭해, 다음 자인 의(義)를 따서 의동(義洞)이라 했다.
내동마을(內洞) 원등2리
인동과 의동사이 안골이 있다고 내동(內洞)이라 했다.
인동마을(仁洞) 원등3리
최초 입주자는 알 수 없고, 1700년 경 전주 이씨 이태원이 보성에서 이주 정착햇다. 그후 광산 김씨와 경주 김씨 등이 이주해왔다. 고려시대 강감찬이 이곳을 지나면서 하룻밤을 지내다 모기가 하도 많아 잠을 이루지 못해 '모기야 저리가라'하고 호통을 친 후 그렇게 많던 모기가 없어졌다는 얘기가 전한다.
학동마을(鶴洞) 원등4리
인동 의동 내동이 차례로 형성되고 난 후 밀양 박씨가 1800년경 입면 제월리에서 이주 정착했다고 한다. 지형이 학(鶴)의 형이고, 초악산 아래 학혈(鶴穴)이 있다고 해 학동이라 했다고 한다.
어덕촌마을(於德村) 원등5리
풍천 노씨 노세중이 1680년경 경남 함양에서 들어와 정착했다고 한다. 양지 바른 곳이 위치,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어덕촌이라 했다. 언덕의 사투리가 어덕이다. 신선이 놀았다는 신선바위, 바닷물이 들어와 배를 매던 쇠고리가 있었다는 배바위가 있다. 6.26전란중 숨진 반공투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군민들이 1961년 세운 충혼탑이 있다.
월경마을(月境) 월경1리
고려말기 남양 홍씨가 처음 터를 잡고, 전주 류씨가 이주했다고 한다. 1510년경 정씨가 입면 삼오리에서 이주해왔다. 곡성현과 옥과현의 경계에 있다고 해 경리(境理)라 했다가 월경리(月境理)로 바꿨다. 겸면과 경계하고 있다.
행정마을(杏亭) 월경2리
성덕처녀가 관음상을 모시고 가다 차일봉을 넘어 마을을 내려다보니 살구꽃이 만발했다. 살구 杏자를 따서 행정(杏亭)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전한다. 심청전의 근원설화로 알려지고 있는 이 설화는 이책 관음사편에서 다루고 있다.
연봉마을(蓮峯) 괴소1리
마을 앞 산세가 연화도수 형국이어서 연봉이라 했다고 한다.
괴소마을(槐所) 괴소2리
최악산 기슭이다. 지세가 고양이형이라 괴소라 불렀다.
서봉마을(棲鳳) 의암1리
마을위에 저수지가 있는데 주변의 산이 소가 누워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 우음(牛飮)이란 마을이 있었다. 쇠미라고도 불렀다한다. 호남고속도로가 마을 앞을 가로질러 나는 바람에 우음마을 등에 흩어져 있던 가구를 1978년 현재의 서봉마을에 새터를 잡아 이주했다.
의암마을(儀岩) 의암2리
반석마을과 의암 두마을이 있다. 마을지표상에 암반이 깔려 있어 반석이라고 했다한다. 물통이라 불리는 폭포수가 있다.
금반마을(金盤) 금반1리
창녕 조씨 조한영이 1700년경 화순에서 이주했다. 금반, 운곡, 배고개 등 3개 마을로 형성되었으나 운곡마을은 1979년 취락구조개선 사업으로 삼거리 밑으로 옮겨 동성(同姓)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 지형이 소반형이라 금반이라 했다
율곡마을(栗谷) 금반2리
해주 오씨 오덕재가 1680년경 남원에서 이주했다. 마을 주위에 밤나무가 무성하여 밤실(율곡)이라했다. 문둥병(나병)환자가 바위에 고인 물을 바르고 고쳤다는 문동바위가 있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 형국이라는 괴티재가 있다. 태(胎)를 묻었다는 태봉성지도 있다.
청계마을(淸溪) 청계1리
마을앞 들이름이 몰이등이다. 거북이가 흙속으로 들어간다는 금구몰니혈에서 나왔다고 한다. 맑은 시내가 흘러 청계라 했다.
봉현 마을(鳳峴) 청계2리
1849년경 공도엽이 담양에서 이주정착했다. 통명산과 대명산 사이에 있어 터를 잡았다 한다. 마을왼쪽에 새지등과 선우고개가 있어 봉현이라 했다. 마을에 해가 있어 세워져 있는 바위를 눕혔다는 무덤바위가 있다.
주산(舟山)마을 농소1리
광산 김씨 김영규씨가 1936년 노적촌에서 살다 이주해왔다. 광복 직후 노적촌에 살던 전 가구가 이곳으로 들어왔다. 마을 생김새가 배의 형국이어서 주산이라 했다. 들이름이 중뫼이다.
오리동마을(梧里洞) 농소2리
원농라 불리는 이 마을은 임진왜란 피난처로 전주 이씨가 처음 터를 잡았고, 그후 문화 류씨와 안동 권씨가 들어왔다. 6.25 전란중 대부분 타지로 이주했다. 쉬빗장들. 잘매재가 있다.
대명마을(大明) 농소3리
1992년 남계마을에서 광산 김씨 김영채가 처음 입주했다. 새로 터를 잡았다고 새터, 대명산 아래 있다해서 대명마을로 불리고 있다.
노동마을(蘆洞) 노동1리
나씨와 홍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통명산을 등지고 계곡에 위치한 부락이다. 마을 산이 갈라지는 곳에 있는 마을의 경우 산골짜기 마을=갈+골>갈의골>가랫골>가래꼴로 변화되었다. 한자로 표기하면서 갈을 갈대로 보고 노동이라 적은 경우가 많았다. 이 마을을 풍수설을 따라 기러기가 갈대를 물고가는 혈이라고도 하나 '갈골'로 불리는 이 마을의 명칭을 그럴듯하게 풀이한 것이다.
남계마을(南溪) 노동2리
통명산을 등지고 삼기면의 남쪽 계곡에 있다고 남계라 한다
동편마을(東便) 수산1리
남쪽으로 국사봉을 바라보며 서족 차일봉. 북쪽 대명산에 둘러쌓여 경치가 좋고 맑은 물이 흘러 산자수명하다고 수산이라 부른다. 마을을 가로지른 내를 중심으로 동편, 서편으로 나뉜다.
수산동마을(水山洞) 수산2리
김해 김씨 김대길이 1810년경 화순에서 이주정착했다. 이 마을에서 화순군 북면  단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혹재(黑峙)라고 한다. 큰 산고개=(크다와 산의 옛말)+재>검재>검은 재로 변화했다. 한자로 표기하면서 검을 黑자를 써서 흑재, 흑치라고 한 것이다.
근촌마을(根村) 근촌1리
밀양 박씨가 1530년경 입주정착했다. 근천은 산골마을은 뜻하는데서 비롯됐다. 산골마을=(산의 옛말중의 하나)+말>萱見>불이말>부리말>뿌리말로 변화했다. 한자로 뿌리 근(根)을 써서 근촌이라 했다. 차천을 중심으로 양지촌, 음지촌이다. 양지촌 북쪽에 병풍바위가 있다.
수금마을(繡錦) 근촌2리
1716년경 금녕 김씨 김유성이 여산에서 들어와 정착했다. 마을이 둘이 있는데 마을 양쪽에 흐르는 물을 이라 하여 수성, 수석으로 불렀다. 윗마을을 국사봉 기슭에 위치한 골짜기와 숲으로 둘러 있어 풍치가 좋아 수금이라 부른다.
복룡마을(伏龍) 경악리
질그릇 굽는 장인들이 한 때 살았다고 한다. 용이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해서 복룡이라고 한 마을, 경악동, 그리고 길옆에 있는 큰 돌이 있었는데 길이 비좁아 지날 때 그 바위를 붙잡고 코를 바위에 얹고 건넛다 하여 코슨바위라 했던 세 마을을 1914년 합쳐 경악리라 했다.
통명마을(通明) 금계리
용인대사가 태어났다 해서 용계라는 마을과 통명리, 월동과 아랫몰(현재 없음)등 4개 마을이 있었다. 닭이 알을 품는 형세라 금계리라 하고, 통명리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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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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