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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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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기면 지명유래

의동마을(義洞) 내동마을(內洞) 인동마을(仁洞) 학동마을(鶴洞) 어덕촌마을(於德村) 월경마을(月境) 행정마을(杏亭) 연봉마을(蓮峯) 괴소마을(槐所) 서봉마을(棲鳳) 의암마을(儀岩) 금반마을(金盤) 율곡마을(栗谷) 청계마을(淸溪) 봉현 마을(鳳峴) 주산(舟山)마을 오리동마을(梧里洞) 대명마을(大明) 남계마을(南溪) 동편마을(東便) 수산동마을(水山洞) 근촌마을(根村) 수금마을(繡錦) 복룡마을(伏龍) 통명마을(通明)
원등1구 의동(義洞)마을
원등리(院嶝里)는 조선시대 역원제(驛院制) 시행 당시 옛 관리들이 공무로 출장나갈 때 숙식을 해결하던 여관 즉 원(院)이 소재하던 곳이라 하여‘원(院)’자와 원(院)이 비등(飛嶝)이라 부르는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여 ‘언덕배기 등(嶝)’자를 취해 ‘원등리(院嶝里)’라 불렀다 전한다. 의동(義洞)은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덕목으로 사람이 항상 행하여야 할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중 현 원등리 3구(院嶝里3區)가 먼저 첫 자인 인(仁)을 취해 인동(仁洞)으로 칭하였기 때문에 다음자인 의(義)자를 따서 의동(義洞)이라 명명하였다 전한다.
원등2구 내동(內洞)마을
내동(內洞)이라고 하는 마을은 마을이 커서 원등리(院嶝里)를 5개부락(의동, 내동, 인동, 학동, 덕동)으로 나누었을 때, 인동(仁洞)과 의동(義洞) 사이 안골에 있다고 하여 내동(內洞)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원등3구 인동(仁洞)마을
인동(仁洞)은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덕목으로 사람이 항상 행하여야 할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중 첫 자인 인(仁)을 취해 인동(仁洞)으로 칭하였다. 마을 조성시에는 마을 가운데로 ‘연갈천’이 있었으나 현재는 우회하고 있다. 이 연갈천을 경계로 하여 옥과현(玉果縣)과 곡성현(谷城縣)으로 나뉘어졌다.
원등4구 학동(鶴洞)마을
마을 형성내력은 원등1리(院嶝1里)와 같다. 인동(仁洞), 의동(義洞), 내동(內洞) 마을이 차례로 형성된 후, 1800년경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재록(朴載祿)이 수원백씨(水原白氏)와 결혼하여 처가 근처를 따라 입면 제월리(齊月里)에서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였다.
원등5구 어덕촌(於德村)마을
삼기(三岐)마을을 내려다보는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며 마을이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어덕촌(於德村)이라 하였다. 덕동(德洞)이라고도 부르며, 80여년전에는 목양리(牧羊里)와 합해 100호(戶)가 넘었으나 자리가 비좁고 위치가 좋지 않아 차츰 줄어들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같은 원등리(院嶝里)이나 조선시대에는 곡성현(谷城縣)에 속하였다.
월경1구 월경(月境)마을
본 마을은 ‘곡성현(谷城縣)과 옥과현(玉果縣)의 경계(境界)에 위치하였다’하여 ‘월경리(越境里)’라 칭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중엽(朝鮮朝中葉) 마을 유림(儒林)들이 ‘월(越)’자 보다는 ‘월(月)’자가 더 운치가 있다 하여 ‘월경리(月境里)’로 개칭한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지금도 겸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월경2구 행정(杏亭)마을
성덕처녀(聖德處女, 심청전의 유래)가 벌교에서 관음상(觀音像)을 모시고 오산(梧山) 관음사(觀音寺)로 가던 도중 쉬는 곳마다 정자(亭子) 이름를 붙여오다 이곳에서 별세(別世)를 했는데, 이분이 생전에 차일봉(遮日峯)을 넘어 암자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니 살구꽃이 만발한 마을이 대촌(大村)을 이루고 있어 ‘살구 행(杏)’자를 따서 ‘행정(杏亭)’이라 불렀다 전해온다.
괴소1구 연봉(蓮峯)마을
마을 앞의 산세(山勢)가 풍수지리적으로 연화도수(蓮花到水) 형국(形局)이다 하여 ‘연봉(蓮峯)’이라 불러 왔다. 그후 연봉마을 좌측 지역으로 수원백씨(水原白氏) 백병선(白柄善)이 원등리에서 이주해 와 정착하며 새로운 연봉마을이란 뜻으로 ‘신연(新蓮)’이라 이름지어 불러 두 마을 이름을 혼용해 사용했으나 지금은 ‘연봉(蓮峯)’으로 통합해 부르고 있다.
괴소2구 괴소(槐所)마을
본 마을은 최악산(또는 초악산) 기슭에 자리잡고 대명산(大明山)을 바라보며 경사진 양지 바른곳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마을 형국이 고양이형이라 하여 괴소(猫所)라 불렀으나 1830년경이 마을출신 한학자인 학산 강진영(鶴山姜震永) 선생이 ‘고양이 묘(猫)’자를 ‘느티나무 괴(槐)’자로 한자음만 바꾸어 ‘괴소(槐所)’라 칭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현재는 원래의 괴소마을과 거리상 300m쯤 위 아래쪽으로 떨어져 나뉘어져 있는 금정마을과 통합되어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국도(國道) 27호선에 접해 있는 금정(金亭)마을은 당초 황새골에서 1978년 취락구조개선(聚落構造改善)으로 현재의 마을터로 옮겨졌는데 ‘쇠쟁이’를 한자화 해 ‘금정(金亭)’이라 명명(命名)하여 부르고 있다.
의암1구 서봉(棲鳳)마을
마을앞 밭 가운데 소나무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봉황(鳳凰)이 서식(棲息)한 곳이라 하여 ‘서봉(棲鳳)들’이라 부른다. 이 들 이름을 따서 ‘서봉(棲鳳)마을’이라 했다. 마을위에 저수지가 있는데 ‘우음저수지(牛飮堤)’라 부른다. 그 주변의 산이 ‘소가 누워 있는 형국’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 형상(形象)은 ‘구시 옆에 소가 누워 여물을 먹고 있는 상(象)’이라는 설(說)에 의해 과거 자리잡고 있었던 마을을 ‘우음(牛飮)마을’이라 불렀으며, 일명 ‘쇠미’라고도 부른다.
의암2구 의암(儀岩)마을
마을 뒷산인 차일봉에서 뻗어내린 산자락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으로 마을이 나뉘어 있다. 즉, 반석(磻石)과 의암(儀岩) 두 마을이 있는데 지표에 암반이 많이 깔려 있어 돌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반석(磻石)이라 부르고, 바위와 폭포가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의암(儀岩)이라 명명(命名)하였다.
금반1구 금반(金盤)마을
마을 지형이 소반형태를 이루고 있어 ‘금반(金盤)’이라 하였다. ‘동성(東星)마을’은 동악산 형제봉(兄弟峰)으로 부터 굽이쳐 흘러 내려온 산맥이 우뚝솟아 태봉(台峰)을 이룬 안산(安山)을 등지고 동으로 통명산(通明山), 남으로 차일봉(遮日峰)을 바라보는 고지대에 위치해 항상 구름이 감싸고 있다하여 ‘운곡(雲谷)’이라 이름하였으나 지금은 마을이 없어지고 ‘동막골’과 ‘장성백이’사이로 옮기어져 ‘동성(東星)’이라 부르고 있다.
금반2구 율곡(栗谷)마을
마을 뒤로는 통명산맥(通明山脈)이 뻗어내려 있고 지형이 곧을 정(貞)자형으로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석정(石井)이라고 불리우는 고을 군(郡)의 소재지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마을 주위에는 밤나무가 무성하여 밤(栗)자와 곡(谷)자를 붙여 ‘율곡(栗谷)’ 또는 ‘밤실’이라 부르고 있다. 1950년대까지 웃밤실(금반2리), 아래밤실(금반3리)로 나뉘어 있었으나 현재는 2리, 3리를 통합하여 금반2리가 되었다.
청계1구 청계(淸溪)마을
마을 앞쪽에 ‘금거북이가 사는 맑은 시내물이 흐르고 있다’하여 청계(淸溪)라 명명(命名)하였다. 마을앞에 있는 들이름은 ‘몰이등’인데, ‘몰이’는 이 지역의 풍수지리적 형국이 ‘황금거북이가 진흙속에 묻혀있다’는 ‘금구몰이(金龜沒泥)’혈(穴)이라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마을 앞쪽 삼기천 상류를 청계천(淸溪川)이라 부르는 것은 ‘이 금거북이가 기어나와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가의 모래속으로 파고 들어간다’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전해온다.
청계2구 봉현(鳳峴)마을
통명산(通明山)과 대명산(大明山)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의 지세가 ‘가활만인지지(可活萬人之地)’로 ‘후세에 자손이 번창하고 영화를 누린다’는 풍수설에 의해 자리 잡은 마을이라 전해온다. 마을 좌측에 ‘새지등’과 ‘선우고개’등의 고개가 있어 마을명을 ‘봉황새가 깃든 고개마루’라는 뜻의 ‘봉현(鳳峴)’이라 칭하였다. 봉현마을은 별칭으로‘을자등’, ‘을자동’ 또는 ‘새지등’이라고 부른다. 이는 마을이 한자로 ‘새 을(乙)’이란 글자(字)를 닮은 산등성이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洞)이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농소1구 주산(舟山)마을
마을뒤에 ‘배고개’가 있고 마을 앞 최악산(또는 초악산)에‘배를 매는 고리’가 있다는 지명과 전설, 그리고 불로치(不老峙)에서 흐르는 물과 금반(金盤)에서 흐르는 물이 합류되는 삼각지점이 Y자 형태로 ‘배의 형국’이 틀림없다 하여 ‘배 주(舟)’자와 마을주변 들 이름이 ‘중뫼’이기에 ‘곡식이 산더미 같이 쌓인다’는 뜻에서 ‘뫼 산(山)’자를 택해 ‘주산리(舟山里)’라 명명(命名)했다. 일명 들 이름을 따 ‘중뫼’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농소2구) 오리동(梧里洞)마을
앞산이 ‘와우혈(臥牛穴)’이고, 옆산에 ‘쉬빗장’들이 있으며, 뒷산은 ‘질매재’가 있어 ‘소가 농사와 더불어 일한다’는 뜻으로 ‘농(農)소’라 불러온 것을 ‘농소(農所)’라 표기했다. 농소는 자연부락명으로 선비들이 선호하는 오동나무가 많이 서식하는 마을이라 하여 ‘오리동(梧里洞)’이라 불렀으며, 오동나무와 더불어 마을에 ‘사슴이 목욕하고 물을 마신다’는 탕록음수(湯鹿飮水)의 사슴혈(穴)이 존재한다 하여 ‘오록(梧鹿)골’이라 불렀다 전한다.
농소3구 대명(大明)마을
대명산(大明山)을 뒤에 두고 통명산(通明山)을 바라보는 산기슭 마을로 수원(水源)이 좋고 농토가 비옥하여 산지이용이 좋아 새로 터를 잡았다 하여 ‘새터(新基)’라 하였으나, 대명산(大明山) 밑에 위치한다 하여 ‘대명(大明)마을’이라 불리우고 있다.
노동1구 노동(蘆洞)마을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이 기러기가 갈대를 입에 물고 날아가는 형국인 ‘비안함노(飛雁含蘆)’의 혈처라는 것으로 이런 의미에서 ‘갈대 노(蘆)’자를 취해 ‘노동(蘆洞)’이라 명명하였다고 전해온다. 한편, 자연부락명으로 ‘갈골’이라 불러오고 있는데, 갈대가 많은 골짜기란 뜻에서 ‘갈골’이라 불러오고 있다는 설과 마을이 산이 갈라지는 골짜기에 위치했기 때문에 ‘갈골’이라 불러오고 있다는 설이 전해온다.
노동2구 남계(南溪)마을
지리적으로 보아 통명산(通明山)을 등지고 삼기면(三岐面)의 남쪽 계곡에 위치하였다 하여 남계(南溪)라 부르게 되었다.
수산1구 동편(東便)마을
남쪽으로 국사봉(國師峯)을 바라보며 서쪽에 차일봉(遮日峯), 북으로 대명산(大明山) 등 명산에 둘러쌓여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맑은 물이 흘러 산자수명(山紫水明)하다 하여 ‘수산(水山)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하천을 중심으로 동편(東便)마을, 서편(西便)마을로 나뉘어 부른다.
수산2구 수산동(水山洞)마을
남쪽으로 국사봉(國師峯)을 바라보며 서북쪽에 차일봉(遮日峯), 동으로 대명산(大明山) 등 명산에 둘러쌓여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맑은 물이 흘러 산자수명(山紫水明)하다 하여 ‘수산(水山)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근촌1구 근촌(根村)마을
곡성의 명산인 통명산(通明山)이 마을위의 대명산맥(大明山脈)에서 흘러내려 갔다는데 근거하여 ‘뿌리 근(根)’자를 택해 ‘근촌(根村)’이라 명명(命名)하였다.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河川)과 ‘평전들’을 중심으로 대명산(大明山)하단 양지쪽에 위치한 마을을 양지촌(陽地村), 국사봉(國師峰) 하단 음지쪽에 자리잡은 마을을 음지촌(陰地村)이라 부른다.
근촌2구 수금(繡錦)마을
마을을 두개의 마을로 구분해 부른다. 즉, 마을 양편에 흐르는 물을 성(城)이라 하여 ‘수성(水城)’으로 부르던 마을 명칭을 ‘수석(水石)마을’로 부르고 있으며, 윗마을은 국사봉(國師峰) 기슭에 위치한 골짜기와 숲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단풍이 비단처럼 물들어 수를 놓은 한폭의 그림 처럼 아름답다’하여 ‘비단 수(繡)’자에 ‘비단 금(錦)’자를 명명(命名) ‘수금(繡錦)마을’이라 불렀다. 1930년 행정구개편(行政區改編)에 의해 근촌2구(根村2區)로 구분되었다.
경악리 복룡(伏龍)마을
용(龍)이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하여 ‘복룡(伏龍)’과 ‘경악동(敬岳洞)’그리고 길 옆에는 큰 돌이 있었는데, 길이 비좁아 왕래할 때 그 바위를 붙잡고 코를 바위에 얹고 건넜다 하여 ‘코심바위’라는 세 마을이 있었다. 일제시대 때 마을의 구장(區長)이 경악동(敬岳洞)에서 살고 있어서 1914년 행정구역개편시 3개 마을을 합쳐 경악리(敬岳里)라 하였다. 1970년 호남고속도로 개설로 경악동은 없어지고, 1987년 취락지 개선사업으로 복룡마을과 코심바위마을만 남게 되었다.
금계리 통명(通明)마을
전하는 바에 따르면, 남동쪽에 불경학자(佛經學者)인 용인대사(龍仁大師)가 태어났다 해서 ‘용계(龍溪)’라는 마을과 북서쪽 통명산(通明山) 자락에 금계리(金鷄里)가 있다. 두 마을 주변에 금계포란(金鷄包卵) 형국이 자리잡고 있다 하여, 용계리와 통명리(通明里)를 통틀어 ‘금계리(金鷄里)’라 명명하였다. 금계리(金鷄里)계곡엔 ‘용계리(龍溪里)’, ‘통명리(通明里)’, ‘명동’, ‘아랫몰’등 4개 마을이 흩어져 있었지만 현재는 통명리(通明里), 용계리(龍溪里) 2개 마을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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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4-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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